식후주라고도 일컫는 디제스티프(digestif)는 흔히 식사 후에 위를 진정시키고 소화 과정을 시작하는 것을 돕기 위해 제공되는 알코올 음료를 일컫습니다. 유럽 다양한 국가에서 허브를 넣은 증류주와 오랜 기간 숙성한 위스키, 브랜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류가 디제스티프로 소비되어 왔습니다. 이렇게 식후에 높은 도수의 술을 마시는 관습은 약 1,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원래 디제스티프는 의료 행위 중 하나로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의약품이 많이 발달되어 있지 않던 시절, 허브를 넣은 술들은 복통을 비롯한 다양한 질병에 흔히 처방되었죠. 식후주로 널리 유행하게 된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입니다.
1700년대에 이르러, 디제스티프는 긴 식사 후 소화를 돕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식탁에 올랐습니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말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직관적으로 통용되는 말이기 때문일까요? 의료적인 목적에서 출발한 음료답게, 식후주는 다양한 쓴맛을 느낄 수 있는 비터즈(bitters)도 상당수 찾아볼 수 있습니다. 높은 알코올 도수도 특징적이죠. 그 외에도 브랜디, 그라파, 셰리, 포트와인, 리몬첼로, 테킬라, 위스키 등이 모두 디제스티프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다이닝 문화에서 식후주는 여전히 조금은 생소한 분야입니다. 하지만 서울에서도 긴 식사 후에 흥미로운 디제스티프 셀렉션을 선보이는 레스토랑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미쉐린 가이드에 등재된 레스토랑 세 곳 소믈리에들의 디제스티프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솔밤
미쉐린 가이드 서울 2023 1스타자연 존중의 철학으로 엄태준 셰프의 현대적인 요리를 선보이는 솔밤은 차분하고 유연한 코스의 흐름과 어울리는 소믈리에의 페어링으로도 사랑받고 있습니다. 식사의 마지막에는 고객에게 디제스티프 메뉴가 제공됩니다. 위스키와 브랜디, 안동소주와 디저트 와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셀렉션을 보고 있으면, 소믈리에가 디제스티프 카트를 끌고 와 고객에게 설명과 함께 다양한 주류의 탐험을 제안합니다.
고동연 소믈리에는 ‘보통 식후주로 고도주를 많이 떠올리지만, 솔밤 코스의 흐름에 따라 메인 디저트와 마지막 작은 다과에도 잘 어울리는 디저트 와인 또한 다양하게 구비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오래 전부터 디저트와인은 유럽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라, 증류주와 함께 폭넓게 리스팅하고 싶었습니다. 각기 다른 매력이 있으니까요. 그 중에서도 디저트 와인 중 가장 최고로 꼽는 샤토 디켐 셀렉션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샤토 디켐은 정말 널리 사랑받는 와인이라 희소성이 높아 다양한 빈티지를 구비하기 힘든데, 저희 솔밤에서는 1986, 1991, 1997, 1998 빈티지를 글라스로 다양하게 제공하고 있어 고객 분들이 큰 흥미를 가지고 좋아해 주시죠. 바틀로는 1988, 1989 빈티지도 보유하고 있고요. 그 외에도 헝가리의 샤토 데레즐라(Chateau Dereszla) 토카이 등 다양한 디저트 와인을 제안하며 개성 있는 스타일을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고동연 소믈리에는 디제스티프를 ‘페어링’에 초점을 맞추어 바라봅니다. “코스의 마지막, 디저트는 가장 즐거운 마음으로 식사가 고조된 상황의 음식이죠. 당도가 높은 디저트의 매력을 더해주기 위해서는 이와 상응하는 고당도의 와인이나 산미가 강렬해 함께 즐겼을 때 조화를 이루는 술을 제안할 수 있고, 화려한 아로마와 높은 도수의 술을 매치하는 것도 좋은 선택입니다. 모든 풍미가 연결되고, 완성되는 시점에서 즐기는 술이라 더 의미가 깊습니다. 식사와 함께 와인 페어링을 즐기신 분이라면 소믈리에와의 신뢰 관계가 쌓일 수 있는데요, 이야기를 나누며 취향에 맞는 술을 추천 드리기도 하고요. 바틀로 와인을 즐기신 분들도 마지막에는 변화와 재미를 느끼실 수 있도록 다양한 주류를 안내해 드립니다.”
레스토랑 알렌
미쉐린 가이드 서울 2023 1스타레스토랑 알렌은 프렌치 테크닉을 기반으로 한국의 다양한 식재료를 조명합니다. 다양한 테루아를 표현하는 전 세계의 와인과 증류주를 폭넓게 만날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알렌의 허수현 소믈리에는 디제스티프 셀렉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저희는 한국에서 느낄 수 있는 사계절의 내음새를 모티프로 다채로운 식후주를 선보입니다. 위스키와 꼬냑과 같은 증류주 뿐 아니라 리큐르와 주정강화 와인도 포함되어 있지요.”
겨울의 문턱에 들어선 지금, 허수현 소믈리에는 계절에 맞는 식후주를 제안합니다. “벌써 낙엽이 지고 겨울이 다가왔습니다. 따뜻한 온기와 화사함을 지닌 증류주와 주정강화 와인을 더욱 주력으로 고객들에게 선보이고 있어요. 프랑스의 칼바도스와 아르마냑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사과 증류주인 샤또 드 브뤼이(Chateau de Breuil)의 칼바도스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숙성 정도에 따라 다양한 풍미를 선택할 수 있도록 V.S.O.P부터 20년, 30년 제품을 갖추었습니다. 사과가 가진 달큰한 풍미가 따뜻함을 더해주며, 과일 특유의 화사함이 느껴져 가을과 겨울 사이의 정취를 감상하며 느긋하게 즐기기 좋은 증류주입니다.”
또한 레스토랑 알렌은 샹파뉴의 주정강화 와인인 하타피아를 다양하게 제안합니다. “연말에 축하와 감사를 나누는 술로 샴페인을 많이 선택하시는데, 식사의 마지막까지도 그 여운을 이어 볼 수 있습니다. 하타피아는 샴페인을 양조한 포도의 머스트에 주정강화를 한 와인으로 포도가 가진 천연 당분을 한껏 느껴볼 수 있는 아주 매력적인 디저트와인이에요. 저희는 스타일이 모두 독창적인 세 하우스의 하타피아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빌마 에 씨’(Vilmart et Cie, Ratafia Pinot Noir NV)는 아주 경쾌하고 깔끔한 과즙미을 느껴볼 수 있으며, ‘피에르 드빌’(Pierre Devile, Ratafia NV)은 숙성된 샴페인에서 느껴지는 고소한 브리오슈와 같은 부드러운 풍미와 더불어 무게감을 주는 너트류의 풍미가 특징이에요. 마지막으로 오귀스탕(Augustin, Ratafia Pinot Noire 2021)은 붉은색의 하타피아로 다채로운 스파이스의 캐릭터와 함께 너트류의 풍미가 매력적이랍니다.”
알렌 허수현 소믈리에는 디제스티프가 와인과 더불어 식사의 시작과 마지막까지의 모든 여정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설명합니다. “무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장면과 같이, 식사를 마무리하며 함께하신 분들과 즐거웠던 시간을 되돌아보고, 감사함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선물과 같죠. 저희는 30여종이 넘는 디제스티프 리스트를 운영하는데 선택지가 다양한 만큼, 고객과의 소통이 더욱 필수적이에요. 각자 원하는 스타일에 맞춰서 추천을 드리는 과정에서, 고객분들과 더욱 교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요. 레스토랑에 들어오며 저희의 디제스티프 카트를 보실 수 있고, 주류 페어링에 증류주나 주정강화 와인을 사용하여 음식과의 조화를 선보인 후 추가적으로 설명을 드리기도 합니다.”
구찌 오스테리아 다 마시모 보투라
미쉐린 가이드 서울 2023현대적으로 재창조한 이탈리아 퀴진을 선보이는 구찌 오스테리아는 다양한 이탈리아 주류로 구성된 디제스티프 셀렉션을 선보입니다. 육인영 헤드 소믈리에는 마치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 것처럼 다양한 이탈리아의 식후주를 소개하고 싶다고 설명합니다. “저희 레스토랑에는 다양한 국가와 다양한 연령층의 고객님들이 방문하세요. 서울을 배경으로 로컬 식재료를 사용한 요리를 선보이면서도 이탈리아 어딘가로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을 함께 느끼실 수 있도록 고민했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셰프님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다양한 지역의 식후주 문화를 보여드리고자 구성했습니다. 북부의 그라파(Grappa)부터, 중부지역의 아마로(Amaro), 남부지역의 리몬첼로(Limoncello)처럼 이탈리아 전역의 상징적인 품목을 엄선해 선보입니다.”
다양한 이탈리안 디제스티프 셀렉션 중 육인영 소믈리에는 두 가지 식후주를 소개합니다.
“뽀에르 에 산드리 아쿠아비테 디비노(Pojer e Sandri, Acquavite Divino)는 이탈리아 북부 트렌티노 지역의 증류주입니다. 이 술은 저희 레스토랑과 같이 지속가능성이라는 신념과 철학을 기반으로 술을 만듭니다. 과거 세계 와인 시장이 커지며 이탈리아의 많은 생산자들이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포도 품종에 집중하던 시기에도, 이 생산자는 토착 품종을 보존하고 와인의 순수함을 표현해내는 데 집중했어요. 스키아바(Schiava)와 라가리노(Lagarino)라는 두 가지 토착 품종을 사용하여 증류한 코냑 스타일의 증류주인데요, 설탕이나 감미료가 전혀 첨가되지 않았음에도 살구와 바닐라, 캐러맬과 같은 달콤한 향을 가진 우아한 브랜디입니다.”
“또한 이탈리아의 식후주에서 리몬첼로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실비오 카르타 리모넬로(Silvio Carta Limonello)는 이탈리아 가장 남단, 사르데냐의 해안가에서 생산되는 명망 있는 술이지요. 보통 리몬첼로는 레몬 껍질을 이용해 만드는데, 이곳의 리몬첼로는 직접 재배한 사르데냐 지역의 레몬을 통째로 사용해 만드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육인영 소믈리에는 디제스티프가 식사의 만족감과 여운을 이어주는 하나의 길이자, 이탈리아의 미식 문화를 더욱 다양하게 느낄 수 있는 기회라고 설명합니다. “코스가 끝난 뒤 작은 다과들이 준비되는데, 커피나 티 메뉴와 함께 디제스티프 메뉴를 함께 소개해 드리고 있습니다. 궁금해 하시는 분들께는 직접 음료를 보여드리고, 선호하시는 맛과 풍미를 여쭤보며 식후주를 추천해 드립니다. 식후주를 즐기는 방법은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고객님들의 취향이 다양하기에 때로는 탄산수나 얼음을 첨가해 더 시원한 느낌을 전해 드리기도 하고, 향을 더 잘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잔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아쉬움이 남을 때, 조금 더 이 즐거움을 오래 느낄 수 있도록 식후주 한 잔을 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