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쁘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음식의 전통은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미쉐린가이드 서울 2023년에 선정된 레스토랑 중 1900년도 초반부터 1960년대 창업하여 현재까지 명맥을 잇는 식당을 살펴봅니다.
1. 한식의 뿌리, 노포라는 내면의 힘
한국 식문화에서 “노포(老鋪)”란 단순히 오래된 식당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노포는 음식의 한 분야를 공고히 하여 레시피를 정립시킨 식당으로 각 분야의 오리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손님에게 최선의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오늘이 어제 보다 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온 곳입니다. 노포의 음식과 그 안에 어린 전통과 철학은 오늘날 한국의 식문화를 발전시킨 깊은 뿌리가 되었습니다. 100년에서부터 50여년에 이르기까지 전통이 깃든 서울의 노포를 소개합니다. 이들의 음식을 맛보고 나서야 비로소 오늘날 서울의 미식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2. 미쉐린 가이드 서울 2023 노포 리스트 (1900년~1960년대 기준)
미쉐린 가이드 서울 2023년에 선정된 레스토랑 중 1900년도 초반부터 1960년대 창업하여 현재까지 명성을 이어가는 곳은 총 12곳입니다. 이 노포들의 나이를 합산하니 876년이라는 시간이 됩니다. 주요 메뉴는 탕 (설렁탕, 곰탕, 도가니탕, 추어탕, 삼계탕), 소불고기 및 육회, 냉면 (평양냉면, 함흥냉면, 메밀국수), 칼국수 및 교자 등입니다. 서울 사람들은 특별한 날에 외식을 했고 집에서 먹을 수 없는 특식이자 보양식을 택했습니다. 돼지고기 보다 소고기 좋아하고, 메밀이나 고구마∙감자 전분으로 면을 만들어 먹다가 60년대 이후부터는 밀가루를 활용한 칼국수와 교자 등을 즐겨 먹었습니다. 이제 미쉐린 가이드를 손에 들고 서울의 노포로 미식 탐방을 떠나 볼까요. 1900년대 초반의 일제 강점기, 40년대의 해방. 뒤 이은 50년대의 6.25. 60년대 전후의 복구, 7~80년대의 산업화, 90년대와 2000년도를 거쳐 2023 현재에 이르기까지 현대사의 굴곡을 지킨 노포의 음식에는 한국인의 희로애락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3. 노포 즐기기
100년 전통
이문설농탕 Since 1904, 설렁탕, 종로구 (119년)
현재 4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 설렁탕 전문점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이자 서울시 허가 제 1호로 공식 등록된 식당입니다. 창업 당시는 종로구 공평동에 있다가 재개발로 인해 2011년부터 지금의 장소에서 영업 중입니다. 이곳의 대표 메뉴는 설렁탕입니다. 당시 서울의 장안에는 설렁탕으로 유명한 식당이 몇 있었는데 이들은 소를 잡으면 머리, 사골, 꼬리, 도가니, 내장 등 다양한 부위를 넣고 오랜 시간 고아 밥과 함께 내었습니다. 이문설농탕은 그 당시의 조리법을 맛볼 수 있는 곳으로 현재는 사골과 도가니 등을 넣고 17시간 이상 무쇠솥에 끓이면서 수차례 기름을 걷어내어 만듭니다. 마치 모시천처럼 뽀얀 백색이 감도는 국물은 처음엔 밋밋한 듯 하지만 목구멍으로 넘어가면서 구수한 감칠맛을 냅니다. 뜨끈한 뚝배기 안에는 탕과 더불어 양지와 머리고기는 물론 다른 곳에는 없는 지라와 우설도 담겨 있습니다. 고기 아래로는 밥과 소면이 육수를 머금고 먹기 좋은 온기로 기다립니다. 첫 입에는 맑고 구수한 국물을 그대로 맛본 후 두번째는 고기를 양념장에 찍어 먹습니다. 이 곳은 화학 조미료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국물에 소금간이 되어 있지 않아 순수한 맛입니다. 그 다음에는 대파를 듬뿍 올리고 김치국으로 간을 하며 소면을 말아 먹습니다. 마지막으로는 국물을 흠뻑 머금은 밥에 깍두기를 올리고 든든한 식사를 마무리합니다.
90년 전통
용금옥 Since 1932, 서울식 추탕, 중구 (91년)
1932년 홍기녀 씨가 무교동에서 창업하였으며 1960년대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습니다. 서울식 추탕을 만들어 온 곳입니다. 농경사회였던 한국은 추수철 논물을 빼고 나면 논두렁에서 펄떡펄떡 뛰는 미꾸라지를 발견했는데 가을에 살이 통통 올라 추어(鰍魚)라 했습니다. 이를 통째로 혹은 갈아서 갖은 재료로 끓여낸 보양식이 추어탕입니다. 이 음식은 맛과 영양이 뛰어나서 농민들도 양반들도 즐기던 별미였습니다. 서울의 청계천에도 미꾸라지가 많았는데 요리 솜씨가 좋은 홍기녀씨가 이를 추탕이라는 메뉴로 만들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은 전국적으로 남원식 추어탕과 원주식 추어탕이 양대 산맥을 이루는데 이 곳은 현재 서울식 추탕을 맛볼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주재료인 미꾸라지는 손님의 취향대로 통째로 넣을 수도 갈아 넣을 수도 있습니다. 국물은 육개장처럼 붉은 빛이 감돌고 그 맛은 얼큰하면서도 구수합니다. 곱창으로 끓여낸 육수에 미꾸라지, 유부, 두부, 목이버섯, 느타리버섯 등을 푸짐하게 넣습니다. 마늘을 넣지 않고 생강으로 깔끔한 맛을 내기에 제피 보다는 후추를 넣는 것이 더욱 맛있습니다. 살아있는 미꾸라지만 쓰는 것이 철칙인데 미꾸라지는 죽은 다음 비린내가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유부가 들어가게 된 원인은 창업 당시 주변에 일본인들이 많았는데 팔고 남은 유부를 구하기 쉬워 넣기 시작했고 미꾸라지와 잘 어울려 정식 레시피가 되었습니다. 현재 용금옥에 가면 서울 추탕과 남도 추탕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젓갈이 많이 들지 않고 깔끔하게 삭힌 깍두기도 별미입니다.
70년 전통
우래옥 Since 1946, 평양냉면, 중구 (77년)
1946년에 창업한 식당으로 평양냉면과 불고기가 대표 메뉴입니다. 창업 당시는 <서북관> 이라는 상호였는데 6.25 전쟁 이후 피난하였다가 다시 찾아왔다 하여 <우래옥(又來屋)>이라는 상호로 변경했습니다. 냉면집으로는 한국에서 3번째로 오래된 곳이며 현재 “평양냉면의 성지”로 인식되어 사계절 내내 만석입니다. 냉면의 육수는 원래 동치미 국물과 소고기 육수를 배합하였는데 70~80년대 냉면 육수 대장균 검출로 인해 한동안 영업 정지를 당했고, 그 이후로 동치미 육수는 쓰지 않고 사태살 기반의 소고기 육수를 내어 국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합니다. 면은 메밀함량은 60~70%이며 감자 전분을 배합하여 찰기를 더합니다. 예전에는 메밀 햠량 100%인 순면이 있었는데 현재는 메뉴에서 사라졌습니다. 고명으로는 무 절임, 배추 절임, 소고기 사태 수육 등이 올라가며 취향에 따라 돼지고기(제육)로 변경도 가능합니다. 육수만 먹었을 때는 다소 간이 센 듯 하지만 메밀면을 풀어 함께 먹으면 식초나 겨자를 따로 넣지 않아도 밸런스가 좋습니다.
60년 전통
고려삼계탕 Since 1960, 삼계탕, 중구 (63년)
1960년 이상림 씨가 명동에 창업한 최초의 삼계탕 전문점입니다. 삼계탕은 반가에서 약병아리에 수삼, 찹쌀, 대추 등을 넣고 푹 고아 먹는 여름의 보양식이었습니다. 이상림씨는 남대문 닭전에서 일하면서 복날 전후로 약병아리가 삼계탕 재료들과 날개 달린 듯이 팔려 나가는 것을 보고 삼계탕을 직접 끓여 파는 식당을 열었습니다. 식당이 성공하여 1978년에 현재의 위치로 자리로 확장 이전하였습니다. 이상림 씨는 양계를 직접 하면서 수평아리를 49일간 키운 웅추를 삼계탕용으로 표준화 하였고 닭 속에 들어가는 부재료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발을 X자 모양으로 하는 것, 삼계탕용 뚝배기를 개발하는 것 등을 정립해 나갔습니다. 뚝배기에 닭 한 마리씩 동시에 끓여낼 수 있도록 특수한 주방 시스템을 구축하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이준희 대표가 2대째 가업을 잇고 있습니다. 탕이 맑고도 깊은 감칠맛이 있으며 4시간 이상 푹 고아낸 닭살은 쫀득 하면서도 뼈가 쏙 빠지도록 부드러운 것이 특징입니다. 최근에는 들깨나 녹두 등을 넣은 걸죽한 육수의 삼계탕 집이 있는데 이 곳은 전통 방식대로 맑고 투명한 국물이 특징입니다. 삼계탕을 주문하면 숙성된 김치, 깍두기와 마늘이 곁들여 나오고 보양의 의미로 인삼주가 나옵니다. 닭고기를 먹고 닭의 육수와 마늘, 수삼의 향이 은은하게 감도는 찹쌀죽으로 마무리하면 온 몸에 힘이 가득 충전되는 기분입니다.
50년 전통
명동교자 Since 1966, 칼국수/교자, 중구 (57년)
1966년 중구 수하동에 <장수장>으로 창업하였으며 1970년 그 당시 가장 번화한 곳인 명동으로 이전하여 그 이름을 <명동칼국수>로 개명했습니다. 이곳이 날로 유명해지자 인근에 칼국수를 파는 식당 다수가 명동칼국수 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고 상표권 문제가 발생하여 1978년 상호를 <1966년 창업. 명동교자 + (구)명동칼국수>로 변경하였습니다. 손님들은 <명동교자>라 부릅니다. 밀가루가 한국에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6.25 이후 미국의 원조 물자를 통해서 입니다. 1960년대 쌀 생산량이 충분치 못하여 쌀에 잡곡을 섞어 먹는 혼식, 밀가루 음식을 먹는 분식을 정책적으로 집행하였고 1969년 1월부터 모든 음식점에서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쌀을 주재료로 한 메뉴 판매를 금지했습니다. 그 이후 수요일과 토요일 점심은 밀가루로 만든 국수가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이 식당은 닭 육수에 애호박, 매운 양파를 기본으로 닭칼국수를 개발하여 66년에 처음 상업화 하였습니다. “칼국수”라는 메뉴의 시초입니다. 최고의 음식 맛을 내기 위해 돼지고기는 암퇘지 생고기만 쓰고 닭고기는 당일 쓸 분량만 매입하며, 참기름은 참깨를 직접 공수하여 직접 착유했습니다. 이 곳의 칼국수는 제물국수 제조법에 충실합니다. 닭으로 미리 육수를 낸 후 최고급 생면용 밀가루로 제면한 면을 육수에 함께 넣어 삶아냅니다. 육수가 면에 스며들어 면 자체가 부드럽고 감칠맛이 좋습니다. 고명으로 올리는 조그만 만두를 “변씨만두”라 부릅니다. 세모 모양으로 빚은 만두인데 알쌈(달걀 개인 것을 얇게 펴서 익히고 잘게 썬 고기소를 넣어 반달처럼 만든 음식) 과 중국의 물만두인 윈투안(雲呑)을 접목하여 개발한 것으로 국물이 흠뻑 스며들고 고기 맛이 고소하여 칼국수에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칼국수를 다 먹고 육수에 밥을 넣어 국밥처럼 먹으면 아주 맛있습니다. 간장과 칼칼한 고추로 만든 양념장으로 간을 하고 만두의 소를 함께 비벼 먹으면 별미입니다. 칼국수와 버금가게 유명한 메뉴가 만두인데 중국의 전통 교자(餃子) 장인에게 전수받아 한국의 입맛에 재해석하여 레시피를 완성했습니다. 속이 비칠 정도의 얇은 피에 최고급 암퇘지 고기, 채소, 부추, 직접 착유한 참기름 등이 입안을 가득 채웁니다. 메인 메뉴도 좋지만 이 곳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김치입니다. 고추와 마늘이 듬뿍 들어간 매운 겉절이 방식으로 3년간 간수를 뺀 신안산 천일염을 쓰고 배추는 계절에 가장 맛있는 산지의 것을 엄선하여 씁니다. 소금으로 절인 후 직접 빻은 고춧가루와 마늘을 듬뿍 넣고 버무려 냉장고에서 하루 숙성하여 완성합니다. 김치는 명동교자의 칼국수, 교자의 맛을 최상으로 이끌어 주면서 주연 못지않은 조연의 역할을 합니다.
이들 노포의 공통적인 특징은 김치에 정성을 많이 들인다는 점입니다. 김치를 따로 돈을 받고 팔지도 않는데 가장 신선한 재료를 구해서 각 메뉴와 어울리는 최상의 레시피를 개발하고 발효 숙성시켜 완성합니다. 김치를 보면 그 식당의 수준을 알 수 있음은 이러한 전통에서 기인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까지 최선을 다해 최상을 고집하는 내면의 힘에서 한식의 뿌리를 발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