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은 한 입의 타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학창시절, 즐겨 먹던 타코는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겼습니다. 진우범 셰프의 삶은 그 순간 미묘하게, 그러나 결정적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애정하는 메뉴에 대한 호기심은 곧 진정성에 대한 집요한 탐구로 번졌고, 그는 기꺼이 대륙을 건너 멕시코 전통의 본류를 마주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서울로 돌아온 그는 멕시칸 퀴진에 대한 한국의 통념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그의 나이 32살, 아시아에서 최초로 미쉐린 스타를 받은 멕시칸 레스토랑 ‘에스콘디도(Escondido)’의 오너 셰프로서, 진 셰프는 텍스-멕스(Tex-Mex)와 캐주얼 푸드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멕시코 음식 문화가 지닌 깊이와 복합미를 온전히 인정받게 하는 데 사명을 걸고 있습니다. 전통에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경계를 확장하는 그의 도전은 이제 막 시작되었으며, 한국에서 멕시칸 파인다이닝의 가능성을 열고 있습니다.
건축에서 키친으로: 열정이 이끈 멕시코 요리에 대한 여정
셰프라는 길은 처음부터 그의 계획에 없었습니다. 미국 UC버클리에서 건축을 전공하던 그는 군 복무를 마친 뒤 스타트업에 몸담으며 젊은 창업자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 역시 언젠가 본인의 직관과 열정을 믿고 새로운 방향을 택해야겠다고 결심하였고, 마침내 익숙한 궤도에서 벗어나 미지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타코는 저에게 가장 원초적인 ‘좋음’이었습니다. 멕시코 음식을 깊이 탐구할수록, 음식 역시 건축처럼 구성과 균형, 역사와 문화에 대한 존중, 그리고 시대적 현상을 반영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건축학도로서 체득한 사고방식은 그의 요리 철학에 그대로 스며들었습니다. 건축가가 공간의 본질을 정의한 뒤 형태를 설계하듯, 그는 요리에서도 먼저 음식의 정체성과 맥락을 꿰뚫은 후 조리의 방향을 설정합니다. 모방이 아닌 본질의 보존을 목표로, 구조적 뼈대 위에 미적 요소를 더해 나가는 방식입니다.
2017년, 그는 본토에서 제대로 배우기 위해 멕시코로 떠나 르 꼬르동 블루 멕시코에 입학하였습니다. 전통과 기법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멕시코 요리 연구에 매진한 결과, 2018년 현지 ‘베스트 셰프 멕시코’ 대회에서 외국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우승을 차지하였습니다. 이후 멕시코 미식 문화의 상징적 공간인 ‘푸욜(Pujol)’을 선택해 살사 부문에서 일하며 마사(Masa)와 몰레(Mole) 등 전통 기법을 더욱 깊이 있게 다듬어 나갔습니다.
에스콘디도의 탄생: 아시아 멕시칸 파인다이닝의 새 시대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몰리노 프로젝트(Molino Project)’를 론칭해 정통 멕시코 요리를 다채로운 방식으로 선보였습니다. 옥수수 가공에 집중한 ‘엘 몰리노(El Molino)’와 스트리트 타코의 생동감을 전한 ‘라 카예(La Calle)’가 그 첫걸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진 셰프의 정체성을 가장 또렷하게 드러낸 공간은 단연 ‘에스콘디도(Escondido)’였습니다. 스페인어로 ‘숨겨진’을 뜻하는 이 레스토랑은 서울 한남동의 조용한 골목 한복판에 숨듯 자리하고 있으며, 손님은 셰프와 단출한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앉아, 각 요리에 깃든 맥락과 손끝의 정성을 가까이서 마주합니다.
에스콘디도에 발을 들이는 순간, 서울의 한적한 골목은 멕시코의 숨결로 다시 태어나고, 테이블은 국경을 넘어선 서사의 무대가 됩니다. 바에 앉은 손님은 셰프로부터 요리에 쓰인 옥수수의 품종, 손으로 빚는 방식,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전통의 서사까지 세심한 설명을 듣습니다. 이는 식전 설명을 넘어, 언어와 맛, 기억이 맞닿는 문화 교류의 현장을 닮아 있습니다. 매일 아침, 옥수수는 몰리노프로젝트의 작은 또띠아 공장에서 신선한 마사로 만들어져 레스토랑에서 또르띠야로 거듭나고, 몰레는 수십 가지 재료의 층위를 정교하게 쌓아올리는 긴 여정 끝에 정통 방식으로 완성됩니다.

몰레와 마사: 그의 요리를 이루는 토대
에스콘디도에서 가장 깊은 이야기를 품은 메뉴는 단연 몰레 입니다. 30가지 이상의 재료를 사용해 만드는 이 전통 소스는 단순한 맛이 아니라, 시간과 기억, 그리고 멕시코의 정체성이 녹아 있는 역사적 산물이자 디쉬입니다.
“멕시코 요리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러스틱(Rustic)’하고 ‘흙내음’이 떠오르지만, 그 속에는 거친 아름다움에 세련된 우아함이 얽혀 있습니다. 문화적으로 몰레는 소스가 아닌 철학이며, 멕시코 전통과의 연결 고리입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메뉴는 셰프의 애정이 깃든 ‘Mole negro with chicken picadillo’입니다. 외관상 닭고기가 중심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요리의 진정한 주인공은 몰레입니다. 수십 가지 재료가 켜켜이 쌓인 몰레가 닭고기를 감싸며 입안에서 작지만 깊은 울림을 만들어냅니다. 몰레가 전하고자 하는 감각적 이야기를, 이 한 접시가 가장 뚜렷하게 들려줍니다.
“미쉐린 스타를 받았다는 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기쁨보다 먼저 느낀 건 막중한 책임감이었어요. 제일 처음 한 일은 팀원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앞으로의 길을 이야기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마사에 대해서도 남다른 집착을 보입니다. 에스콘디도에서는 매일 직접 옥수수를 갈아 또르띠야를 빚으며, 국내에서는 드문 방식으로 전통을 고수합니다.
“멕시코 요리는 옥수수에서 시작합니다. 옥수수를 정성 들여 가공하고, 재료 본연의 힘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음식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한국에서 멕시코 음식에 대한 인식에 도전하다
진 셰프는 한국에서 멕시코 음식에 대한 오해가 여전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멕시코 요리를 텍스-멕스 스타일에만 국한된 것으로 생각하며, 몰레나 닉스타말화된 또르띠야처럼 정통 조리법이 담고 있는 깊이와 풍미를 낯설게 느끼거나 선뜻 다가가지 못합니다.
“멕시코 음식은 싸고 기름지고 매운 음식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많습니다. 하지만 멕시코 요리는 균형과 깊이, 그리고 음식과 문화가 맞닿아 있는 연결의 미학입니다.”
그는 에스콘디도를 통해 이러한 인식을 바꾸고자 하였습니다. 그의 목표는 궁극적으로는 멕시코라는 문화 전체를 진심으로 전달하는 데 있습니다.
앞으로의 비전: 문화 교류의 다음 단계
에스콘디도가 자리를 잡은 지금, 진우범 셰프의 시선은 더 넓은 무대로 향하고 있습니다.
“멕시코가 제 요리에 영향을 주었듯, 언젠가는 멕시코에서 한국의 음식 철학을 담은 다이닝을 선보이고 싶습니다.”
그는 멕시코의 재료와 테크닉을 통해 한국에 정통 멕시칸 퀴진을 소개한 것처럼, 또 한 번의 도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통과 전통이 만나는 미식의 교차점에서, 그는 자신의 요리 철학을 확장시키며 새로운 문화적 가능성을 그려나가고 있습니다.
진 셰프의 여정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서울의 조용한 밤, 에스콘디도의 조도 낮은 조명 아래에서, 그는 오늘도 멕시코를 요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