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문명은 반드시 아름다운 술을 갖고 있다. 뛰어난 문화만이 인간의 감각을 세련되고 아름답게 하며 풍부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뛰어난 술을 가진 국민은 발전된 문화의 소유자이며 어떤 술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각자의 교양의 깊이를 나타내고 있음과 동시에 인생의 크나큰 즐거움의 하나이기도 하다.” –사카구치 긴이치로
전통주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탁주는 한국인들이 천 년 넘게 즐겨온 술이다. 고두밥과 밀누룩에 물을 섞어 발효시킨 후 양조된 술덧을 거칠게 걸러낸 탁주는 ‘막, 금방 걸러낸 술’이어서 ‘막걸리’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또한 색이 희어서 백주(白酒), 탁해서 탁주(濁酒) (혹은 탁배기, 탁백이, 막자, 탁바리, 탁주배기), 집집마다 담가 마시는 술이어서 가양주(家釀酒), 농사지을 때 마시는 술이어서 농주(農酒), 제사 지낼 때 제상에 올려서 제주(祭酒), 백성이 가장 많이 즐겨 마시는 술이어서 향주(鄕酒), 나라를 대표하는 술이어서 국주(國酒)라고 불리기도 했다.
막걸리는 밀 재배가 증가했던 고려 시대 때부터 대중화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에 머물면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책으로 인종 원년(1123)에 간행되었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고려에는 찹쌀이 없어 멥쌀과 누룩으로 술을 빚는다. 술맛이 독하여 쉽게 취하고 빨리 깬다. 왕이 마시는 술은 양온서(良醞署)에서 빚는다. 청주와 법주 두 가지가 있고 질항아리에 넣고 명주로 봉해 저장한다. 그러나 서민들은 양온서(良醞署)에서 빚은 것과 같은 좋은 술을 얻기 어려워 맛이 박(薄) 하고 빛깔이 짙은 것을 마신다.”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탁주는 이화주였다. 멥쌀가루로 만든 떡과 멥쌀 누룩으로 빚은 이화주는 흰죽같이 걸쭉하여 숟가락으로 떠먹거나 갈증이 나면 찬물에 타서 마시던 특별한 술이었다. 하지만 당시 모든 사람들이 탁주를 즐겨 마셨던 것은 아니다. 귀족층은 맑은 청주와 약주를, 일반 백성들은 탁주를 마셨다. 고려 시대 주선 이규보(1168 – 1241)가 남긴 백주시(白酒詩)에도 사회적 계급에 따라 술 문화가 차별화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내 벼슬 않고 떠돌 때는
마시는 것이 오직 막걸리여서
어쩌다 청주를 만나면
취자히 않을 수 없었네.
높은 벼슬자리 올랐을 적엔
막걸리 마시려 해도 있을리 없었고…”
막걸리는 발효주다. 쌀의 전분이 누룩 속의 효소에 의해 당화되고 당을 분해시킨 누룩 속의 효모가 에너지를 얻으면서 부산물인 에틸알코올과 이산화탄소를 생성하는 절차를 통해 완성된다. 1910년 이전의 막걸리는 거친 누룩과 고두밥에 물을 혼합한 후 그대로 방치하여 발효시킨 지극히 간단한 술이었다. 술을 빚었다기보다 술이 스스로 만들어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단순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탁하고 걸쭉했던 막걸리는 식량이 부족하던 시절 백성들의 허기를 달래주는 식사 대용으로 많이 소비되었다. 농부들이 새참으로 막걸리를 마셨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막걸리에는 요구르트의 10배가량 되는 유산균이 함유되어 있어 피로회복에 효과적이다. 또한 유기산은 갈증을 해소해주고 신진대사를 돕는다. 그뿐만 아니라 막걸리에는 소화에 좋은 식이섬유가 풍부하고 단백질과 필수 아미노산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 게다가 알코올 도수가 5% – 6%로 낮아 노동 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는 탁월한 에너지원이었다.
한때 대한민국 주류 총 소비량의 80%까지 차지하기도 했었던 막걸리는 1988년 이전까지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마셨던 술이었다. 하지만 80년대 후반부터 막걸리는 주류 시장에서 점차 경쟁력을 잃기 시작했다. 탁주 소비의 하강세는 계속 이어져 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시장 점유율이 한 자릿수까지 하락하기도 했었다.
그랬던 막걸리가 2009년을 기점으로 이른바 ‘막걸리 붐’을 맞이하게 되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03년부터 2005년까지 탁주 출하량은 의미 있는 폭의 상승세를 보인 후 2009년부터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막걸리 붐의 최정점을 찍었었던 2010년에는 3억 5천 리터의 막걸리가 출하되었다. 그 수치는 과거 8년간의 막걸리 소비 증가량의 4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막걸리 붐은 국내는 물론 해외 주류시장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전국의 크고 작은 양조장들이 더욱 다양화된 막걸리 상품 개발에 뛰어들었다. 프리미엄 막걸리 시대가 도래했고, 지역별 팔도 막걸리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모던한 감성의 소비 공간이 늘어남에 따라 탁주 소비는 더욱 증가하였다.
생막걸리와 살균막걸리, 쌀 막걸리와 밀가루 막걸리, 전통 막걸리와 개량 막걸리, 감미료 막걸리와 무감미료 막걸리 등 소비자의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막걸리는 현재 2,000종이 넘는다. 프리미엄 막걸리의 경우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이 반영된 제품, 인공감미료 무첨가 제품, 일반 막걸리보다 높은 알코올 도수의 제품, 국산 재료와 전통누룩으로 만든 제품 등 현재 총 28개 지역에서 46여 종의 고급 탁주가 생산되고 있다.
과거 ‘노동’이라는 코드와 직결되었던 막걸리는 저도주 선호 추세, 우리 술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 그리고 탁주 자체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장점에 힘입어 소비자들의 인식까지 변화시키고 있는 추세다. 게다가 2016년 2월을 기점으로 소규모 주류 제조 면허가 시행됨에 따라 21세기형 주막인 하우스 막걸리 제조장이 등장하면서 막걸리는 단순한 유행이 아닌 하나의 주류 문화로 정착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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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학교와 바앤다이닝 매거진에서 제안하는 막걸리 페어링 (사진: 바앤다이닝)
1. 오통영: 대하전 & 호랑이 생막걸리 (배혜정도가)
통영 굴을 비롯해 산지 직배송으로 받은 재료를 활용한 전, 무침 요리, 탕, 생물까지 두루 즐길 수 있는 오통영. 그중 대하의 고소한 풍미를 살리기 위해 부침 옷을 얇게 입힌 대하전과 자연스러운 단맛이 깃든 호랑이 생막걸리를 곁들여 담백한 페어링을 완성했다. 이 조화에는 전 요리에 간장 대신 소금을 내는 이곳만의 상차림도 한몫을 한다. 간장이 지닌 맛에 비해 가벼운 요리와 술의 무게를 고려해 핑크 솔트를 곁들여 담백한 맛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것. 술에서 느껴지는 옅은 쌉쌀함이 입안을 정리해주는 역할도 한다.
호랑이 생막걸리: 생쌀 발효법으로 맛과 향을 풍부하게 살린 술
2. 수불: 레드페퍼 마늘 소고기 튀김 & 가평 잣 막걸리 (우리술)
스테이크용 소고기 안심을 간 마늘, 굴 소스, 참기름 등으로 밑간한 후 전분과 찹쌀가루를 섞은 반죽으로 바삭하게 튀겨 낸다. 그다음 고추기름과 마늘, 건고추를 볶다가 튀긴 소고기와 특제 떡갈비 소스를 넣고 버무리는데, 매콤하고 달금한 향이 식욕을 자극한다. 여기에 인위적인 향을 쓰지 않아 잣의 풍미가 은근하게 지속되는 가평 잣 막걸리를 곁들이면 차분하게 입안이 마무리된다.
가평 잣 막걸리: 국산 잣과 햅쌀로 빚어 고소하고 신선하며 목 넘김이 부드러운 술
3. 복덕방: 깻잎 고추장 생 삼겹 볶음 & 우렁이쌀 손 막걸리 (양촌양조장)
안주와 마실 술의 양을 선택하면 주인장이 막걸리를 추천해 주는 것이 특징. 기존 생막걸리보다 3배가량 장기 저온 숙성을 거쳐 맛이 깊고 목 넘김이 부드러운 (은은한 사과향 / 1920년부터) 우렁이쌀 손 막걸리에는 깻잎 고추장 생삼겹을 매칭했다. 깻잎에 오가피와 매실 원액, 결정과당으로 단맛을 낸 고추장 삼겹살을 감싸 먹으면 매콤하면서 녹진한 풍미가 우렁이쌀 손 막걸리와 포근하게 어우러진다.
우렁이쌀 손 막걸리: 우렁이 농법으로 재배한 논산 햅쌀로 빚은 막걸리
4. 느린마을 양조장&펍: 양조장 돼지 목살 그릴 스테이크 & 느린마을 막걸리 (배상면주가)
돼지 목살을 정확히 195분간 술에 재워 육질이 한층 부드럽고 고기에 밴 사과 향이 코 끝을 스치며 막걸리 향과 어우러진다. 메뉴 중 막고기 한 접시 역시 막걸리로 훈증해 부드러운 육질과 잡내 없이 즐길 수 있다. 또 1일에서 10일까지 숙성 정도에 따라 산미와 탄산감이 달라지는 4가지 버전의 막걸리와도 함께 할 수 있다.
느린마을 막걸리: 숙성 정도에 따라 각기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는 막걸리.
5. 부부 0325: 부부 보쌈 & 홍천강 탁주 (전통주조 예술)
잡내가 적고 지방의 감칠맛이 좋은 버크셔 K를 삶은 후 팬에서 한번 더 구워 보통 보쌈보다 훨씬 쫄깃한 고기를 즐길 수 있도록 한 것. 여기에 와사비와 마늘, 유자 등을 배합한 쓰유 드레싱과 올리브오일에 볶아낸 파를 곁들이는데, 알싸한 파의 풍미가 홍천강 탁주의 짭조름한 맛을 끌어낸다. 또 담백하고 드라이한 맛으로 입안을 깔끔하게 정리하며 다음 한 입을 부르는 효과까지 불러일으킨다.
홍천강 탁주: 비교적 높은 도수와 멥쌀 술 특유의 담백하고 드라이한 풍미로 애주가들이 즐겨 찾는 술.
6. 남산골산채집: 참나물 무침과 편육구이 & 소백산 막걸리 (대강양조장)
막걸리 특유의 시금털털한 맛에 구수한 곡물 향이 더해진 소백산 막걸리와 달콤하면서도 짭조름하게 구운 돼지 편육이 맛깔스러운 조화를 이룬다. 사과와 배 등 과일 양념에 재운 돼지 목살을 팬 프라잉 하여 불향을 입혀 내는데, 여기에 매실 고추장, 참기름 등 소량의 양념을 사용한 참나물 무침을 곁들여 입맛을 돋운다.
소백산 막걸리: 80여 년 된 항아리에서 빚어내는 달큼하고 푸근한 맛
7. 셰막: 숯불 목살 양념구이 & 백련 막걸리 미스티 (신평양조장)
숯불 목살 양념구이는 간장 양념한 뒤 팬에서 익히고 직화로 한 번 더 불 향을 살렸는데, 간이 세지 않아 부드러운 탁주와 잘 어울린다. 백련막걸리 미스티는 맛은 가볍고 질감은 크리미한 상반된 성질을 동시에 지녀 고기 요리의 무게감에 뒤지지 않으면서도 옅은 단맛이 요리에 곁들이는 유자 간장 부추, 피클의 산미와 만나 기분 좋은 마리아주를 이룬다.
백련 막걸리 미스티: 당진의 명품 해나루 쌀을 원료로 가벼운 맛과 크리미한 질감을 구현한 막걸리
8. 누룩나무: 콩나물전 & 해창 막걸리 (해창주조장)
숙취 해소에 탁월한 콩나물을 푸짐하게 부쳐낸 메뉴로 생콩나물의 사각사각한 식감이 장점이자 특징이다. 여기에 채 썬 양파와 아몬드 슬라이스를 고명으로 올려 기름진 끝 맛이 정돈되고 고소한 뒷맛이 남는다. 자칫 가볍게 느껴질 수 있는 콩나물전에 점도가 있고 묵직한 해창 막걸리를 매칭하면 좋은 밸런스를 맛볼 수 있다.
해창 막걸리: 찹쌀의 은은한 단맛과 맵쌀의 산뜻함이 조화를 이루는 막걸리
9. 백곰 막걸리&양조장: 달고기 소금구이 & 오미자 생막걸리 (문경주조)
백곰 막걸리&양조장은 2백 종이 넘는 한국 술 리스트. 오미자 막걸리는 진한 분홍빛 컬러에 자칫 달 것 같은 인상을 받지만 드라이함과 당도 그리고 오미자 특유의 맛이 조화를 이루는 한 잔으로 산미와 단맛이 좋아 식전주로도 평이 좋다. 여기에 서울에서는 주로 포 뜬 형태로만 만날 수 있다는 귀한 달고기를 부산에서 공급받아 별도 양념 없이 구워내어 탄력 있는 생선 살과 고소한 맛, 그리고 오미자 막걸리의 마리아주를 느낄 수 있다.
오미자 생막걸리: 분홍빛 컬러와 복합적인 맛으로 다양한 연령층에게 사랑받는 막걸리
10. 숨은골목: 묵은지 김치전 & 금정산성 막걸리 (금정산성토산주)
양념을 씻어내 말쑥한 묵은지를 통째로 부쳤다. 유채유를 최소한으로 사용해 맛이 깨끗하고 담백한 가운데, 아삭하고 바삭한 식감의 비밀은 6 가지 곡물 가루를 섞어 24시간 숙성한 반죽에 있다. 김치전 특유의 새콤함은 금정산성 막걸리의 강한 산미를 중화시켜 눅진하고 향긋한 누룩 향을 보다 온전히 즐길 수 있다.
금정산성 막걸리: 금정산성마을 전통 누룩이 빚어내는 묵직하고 기분 좋은 신맛
11. 푸른별 주막: 생두부 태백 김치 & 은자골 탁배기 (은척양조장)
두부김치는 막걸리 하면 응당 떠오를 정도로 전형적인 막걸리의 매칭 안주다. 강원도 정선에서 매일 가져오는 손두부를 데워 태백산 김치와 함께 숭덩숭덩 썰어 내놓았다. 그 모양새는 투박하지만 손두부 특유의 구수한 깊은 맛이 먹음직스럽고 정겹다. 김치는 젓국 맛이 강하지 않고 깔끔하기 때문에 큼직하게 두부를 감싸 먹기 좋다. 여기에 은자골 탁배기를 곁들이면 마치 탄산음료 같은 청량함에 입안에 암은 텁텁함은 가시고 은은한 끝 맛이 남는다.
은자골 탁배기: 쌀을 오래 씹었을 때 느껴지는 은은한 단맛과 기분 좋은 탄산감
발행일 2017.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