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평창의 찬바람에 옷깃을 여몄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춘분(春分)은 한참 전에 지났건만, 퇴각을 앞둔 겨울은 다가온 봄을 시샘했다. 1년 전 이곳에선 동계올림픽이 열렸다. 개폐회식 장소이자 설상경기의 격전지였다. 당시 평창을 휘감았던 혹한과 칼바람은 선수들과 취재진, 관람객 모두를 경악하게 했다. 하지만 선수들의 열정과 자원봉사자들의 헌신 덕분에 여느 때보다 뜨겁고 성공적인 올림픽으로 마무리됐다. 평창IC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평창군 용평면 한국전통음식문화체험관 정강원의 김민지 부장도 뜨거웠던 올림픽의 열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올림픽 기간처럼 한국 음식에 대한 외국인들의 관심이 높았던 적이 없어요. 올림픽은 스포츠 대회지만 한국 전통음식을 알리는 박람회이기도 했죠.”
늦은 봄소식이 친숙한 김민지 부장은 솜씨 좋게 평창의 봄을 한 상 차렸다. 정강원을 대표하는 음식인 ‘전통비빔밥’이었다. 함지박에 깨를 솔솔 뿌린 밥을 담고 그 위에 취나물, 곰취, 호박, 곤드레, 고사리, 표고버섯 등 18가지 신선한 재료를 가지런히 올렸다. 맨 위에는 정성스럽게 부친 백지단과 황지단을 얹었다. 봄기운이 완연한 5월에는 치커리와 시금치 등 봄채소들이 대열에 합류한다. 식재료는 정강원이 주변 3300㎡ 규모의 밭에서 직접 재배한다. 여기에 고추장과 미역국을 넣은 뒤 부지런히 비비면 봄내음 물씬 풍기는 비빔밥 완성.
숟가락 그득하게 담아 입에 넣으면 표고버섯 향이 가득 퍼진다. 평창에서 나고 자란 나물들의 맛과 향이 풍성한 화음을 연출했다. 정강원은 나물을 무칠 때 파, 마늘을 쓰지 않는다. 강한 향이 나물 고유의 맛을 해치기 때문이다. 비빔밥의 소화를 돕는 국으로 미역국을 선택한 것도 같은 이유다.
“쌀뜨물과 간장만 넣고 너덧 시간 충분히 끓여요. 이러면 자극 없는 미역국이 완성됩니다. 비빔밥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훌륭한 파트너죠.”
식탁에 함께 오른 반찬들도 존재감이 확실하다. 2017년에 담근 김치, 2015년부터 삭힌 묵은지는 식탁에 품격을 더해줬다. 강원도를 대표하는 작물인 감자로 만든 조림 요리는 별미다. 물 한 방울 넣지 않고 간장, 물엿, 식용유와 함께 세 시간 동안 조렸다. 탄탄하면서도 쫄깃한 식감이 일품이다.
“비결은 센 불이에요. 불이 강하면 감자가 자신의 몸에서 물을 빼내면서 잠기죠. 이걸 조리면 찰진 감자조림이 완성됩니다.”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비빔밥이지만, 세심한 정성이 담긴 정강원 전통비빔밥은 그래서 더욱 감동을 준다.
정강원 앞마당에 늘어선 700여 개의 장독도 봄맞이 준비에 한창이었다. 십만 대군이 도열한 듯 질서정연한 장독들 속엔 간장과 된장, 막장, 고추장이 고루 담겨 있었다. 정강원은 해마다 3~4월에 영월 콩 50가마니를 삶아 메주를 빚는다. 이후 메주를 띄워놓고 소금물을 부어 간장과 된장을 가른다.
새로 만든 장을 비어 있는 독에 차례로 채워 넣는다. 장은 만든 지 3~5년이 지나면 가장 맛깔나다고 한다. 그보다 오래되면 수분이 날아가 되고 짜다는 것이다.
장 담글 때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있단다. 첫째는 소금, 둘째는 정성이다. 정강원에선 매년 5톤 규모의 천일염을 사와 소금창고에 넣은 뒤 간수를 뺀다. 간수가 완전히 빠질 때까지 걸리는 기간만 6~7년이다. 간수가 완벽하게 빠져 고슬고슬해진 소금에선 짠맛보다 단맛이 더 돈다고 한다. 이 소금으로 장을 담그고 요리를 하고 간도 맞춘다. 정강원의 으뜸 일꾼이다. 때문에 정강원 사람들은 매년 품질 좋은 소금을 찾기 위해 전남 신안으로 향한다.
“소금을 비롯해 모든 식재료는 직접 눈으로 확인합니다. 귀찮고 힘들지만 음식은 솜씨보다 정성이기에 결코 포기할 수 없어요.”
평창에서 차로 한 시간가량 달려 강릉에 들어서자 웅크렸던 봄이 한껏 기지개를 켰다. 봄의 전령인 벚꽃이 경포호숫가를 분홍빛으로 수놓았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 너머로 강릉아이스아레나가 눈에 들어왔다. 평창올림픽 기간 빙상경기가 열렸던 곳이다. 강릉은 평창보다 상대적으로 기온이 높아 올림픽 기간에도 많은 사람이 몰렸다. 한국의 ‘메달밭’인 쇼트트랙과 스피드스케이팅 경기가 이곳에서 열린 것도 관람객들의 발길을 이끈 이유였다.
경포호에서 가까운 초당두부마을로 향했다. 초당(草堂)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설가인 허균의 부친 허엽 선생의 호(號)다. 허 선생 집 앞의 맛좋은 샘물과 깨끗한 강릉 바닷물로 간을 맞춰 두부를 만든 것이 시작이었다. 두부 맛이 좋다고 입소문이 나자 허 선생의 호를 붙여 초당마을이 됐다. 자연스레 두부도 ‘초당두부’로 불렸다.
콩, 물, 간수만 쓰이는 두부는 모양과 색이 단순하지만 제조 과정을 보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흰콩을 7~8시간 물에 불린 뒤 맷돌에 곱게 간다. 이를 무명 자루에 담아 비틀어 짜면 두유가 나온다. 두유를 솥에 담고 살살 저으면서 끓인다. 여기에 간수를 고루 넣으면 두부 꽃이 피면서 엉긴다. 이걸 틀에 넣어 굳히면 두부가 된다. 이때 무명 자루에 남은 찌꺼기가 비지, 굳히기 전이 순두부다.
초당두부마을 안쪽에 자리 잡은 초당할머니순두부집엔 찾는 이들이 많아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야 한다. 은행처럼 화면에 번호가 뜨면 입장한다. 테이블에 앉아 주문을 하면 순차적으로 찬과 음식이 나온다. 공장 생산라인처럼 체계화된 시스템과 현대식으로 탈바꿈한 식당이 깔끔하고 편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도시처럼 변한 식당에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식당 모양새는 달라졌어도 두부 맛은 변하지 않았다. 대표메뉴는 순두부백반이다. 순두부가 고소하고 담백하면서도 짠 기운이 있어 굳이 간장에 찍어 먹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반모도 함께 주문했다. 두툼하고 큼직한 두부 두 조각이 나왔다. 순두부보다 훨씬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다. 찬으로 나온 김치와 깍두기, 멸치볶음, 깻잎장아찌를 두부에 얹어서 먹는 재미는 덤이었다. 함께 등장한 비지에는 새우젓이 들어가 짭조름했고, 된장국에선 시골메주의 향이 물씬 풍겼다. 옥수수 막걸리도 같이 마셨다. 옥수수 특유의 향과 맛은 두부와 멋진 팀워크를 선사했다.
두부전골, 두부선, 두부조림 등 두부를 이용한 조리법은 50여 가지가 넘는다. 더 흥미로운 건 초당두부마을에선 새 조리법이 계속 등장한다는 것이다. 순두부젤라또는 순두부로 만든 아이스크림이다. 한 입 떠 먹으면 두부 향과 젤라또 재료인 우유, 계란, 설탕 맛이 함께 춤을 추며 녹아든다. 순두부젤라또 외에 인절미젤라또, 강릉커피젤라또, 피스타치오젤라또, 한라녹차젤라또 등 다양한 메뉴가 가지치기 중이다.
순두부로부터 보다 강한 자극을 받길 원하는 이들은 짬봉순두부집 동화가든에 긴 줄을 섰다. 일명 ‘짬순이’라고 불리는 이 메뉴는 얼큰한 짬뽕 국물에서 건져낸 순두부의 포실포실한 식감이 일품이다. 쉼 없이 진화하는 순두부의 ‘무한변신’은 현재 진행형이다.
강원도의 옛 정취를 느끼고자 찾아간 곳은 강릉시내에 있는 강릉감자옹심. 시골 할머니댁을 연상시키는 식당은 음식 종류도 소박했다. 순감자옹심이와 감자옹심이칼국수, 감자송편, 동동주 이렇게 네 가지뿐이다. 방석에 앉자마자 주문한 동동주는 역시나 옥수수 막걸리. 불에 그을린 나무손잡이가 달린 오랜 스테인리스 주전자에 담겨 나온 옥수수 동동주의 맛은 노란 빛깔만큼이나 진했다.
동동주를 두어 잔 맛보자 순감자옹심이와 감자옹심이칼국수가 등장했다. 동그란 옹심이를 입안에 넣자 사박사박 씹히는 식감에 금방 중독됐다. 감자를 간 뒤 찌꺼기를 전분에 섞으면 이렇게 사박사박한 옹심이를 만들 수 있다. 멸치국물과 조개, 양파, 다시마를 넣고 푹 끓인 뒤 참깨를 그득하게 뿌린 국물은 입을 흐뭇하게 했다. 굵기가 들쭉날쭉한 손칼국수는 뚝뚝 잘도 끊겼다. 입안에 넣으면 입술을 미끄럼틀처럼 타고 호로록 들어갔다. 정신없이 허기를 달래고 나자 낙서 가득한 벽과 고가구가 눈에 들어왔다. 강원도를 대표하는 작물인 감자와 옥수수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렇게나 맛있는 이야기를 써내려오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즈음 주문진항으로 향했다. 경포호에서 차로 20여 분을 달려 도착한 항구에선 비릿한 바닷바람에 부슬비가 실려 다녔다. 하루일과를 마무리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장치찜과 곰치국 전문점인 월성식당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장치와 곰치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못난이다. 누구도 찾지 않아 푸대접을 받아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뒤집혔다. 월성식당의 원효식 사장은 “곰치 가격은 무서울 정도”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곰치는 큰 놈의 경우 1m도 넘게 자랍니다. 수확량이 적은 겨울철에는 한 마리에 최고 20만원도 하죠. 말 그대로 ‘귀한 몸’입니다.”
곰치는 냉동해선 안 된다. 얼렸다 녹이면 살이 스펀지처럼 퍽퍽해져 곰치 본연의 매력을 상실한다. 생물로만 취급해야 하는 특성도 곰치 가격을 밀어 올렸다.
곰치에 묵은지를 넣고 칼칼하게 끓여낸 곰치국의 매력은 생선답지 않게 비린 맛이 없다는 것이다. 비린내 때문에 생선을 입에 대지 못하는 사람들도 곰치국에 숟가락을 갖다 댄다. 곰치 살은 순두부처럼 흐물흐물해 호로록 마실 수 있다. 부드러운 식감과 고소하고 짭조름한 곰치의 맛이 뜨끈하게 어우러졌다. 항구의 차가운 냉기를 덥혀주는 국물이었다. 보다 매콤한 곰치국을 원한다면 청양고추로 맵기를 조절할 수 있다. 가스버너에 냄비를 얹어 나오는 곰치국은 지나치게 오래 끓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아까운 살점이 해체되면서 냄비 바닥에 붙어 탈 수 있기 때문이다.
월성식당을 찾는 많은 식객이 장치찜과 곰치국 소(小)자를 하나씩 주문한다. 그래서 ‘장치찜 세트’로도 불린다. 매콤한 장치찜과 부드러운 곰치국의 궁합이 그만큼 환상적이기도 하다. 벌레문치로도 불리는 장치 역시 못생긴 생선의 진가를 보여주는 녀석이다. 강원도 감자와 달달한 겨울 무 위에 장치를 얹고 양념장을 끼얹어 20~25분간 자작하게 끓이면 찜요리가 완성된다. 식당은 맛있게 먹는 법도 친절하게 소개해줬다. 하얀 장치살을 조림국물에 푹 적셔서 먹는 것이다. 국물에 밥과 무생채를 같이 넣어 비벼먹는 것도 단골들이 즐기는 방식이다. 이러면 밥 두 공기는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사라진다. 밥도둑 중 주범인 매콤한 양념 조리 비법을 슬쩍 물어봤다. “절대 알려줄 수 없다”는 단호한 답변이 돌아왔다.
원래 생선은 클수록 비린내가 강한 편인데 장치는 크기에 비해 담백하다. 원효식 사장은 “장치를 3일 동안 해풍 속에서 구덕하게 말립니다. 숙성시킨다고 보면 되죠. 그래야 찜을 해도 살이 풀어지지 않고 맛이 깊게 뱁니다.”
식사를 마치고 빵빵해진 배를 두드리며 걸었다. 평창올림픽 마스코트인 수호랑과 반다비 스티커와 인형들이 항구 곳곳에서 밝게 손을 흔들었다. 출항을 앞둔 배는 전구를 환하게 켰고, 선원들이 부지런히 짐을 실었다. 건어물 가게 상인들은 늦은 시간까지 좌판을 벌리고 손님과 흥정했다. 물건을 파는 이도, 사는 이도 항구의 깊어가는 밤 속에서 함께 웃었다. 올림픽은 끝났지만, 강원도에는 이전보다 더 활기가 돌았다. 강원도에 힘찬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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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홈페이지: https://www.genesis.com)
발행일 2019.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