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가스의 계절은 주방이 아니라 땅에서 시작됩니다. 정하완 셰프와 그의 부모님이 함께 일구는 와니농장에서는 수많은 채소들이 제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직접 밭을 일구어 생산한 식재료들을 사용하는 점을 인정받아 미쉐린 가이드 서울 2023에서 새로운 그린 스타 레스토랑으로 선정된 만큼 땅에 대한 그의 애정은 다른 셰프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농장에서 만난 그는 셰프라기보다는 농부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어있는 종택의 오래된 땅은 가장 오늘다운 맛을 내는 채소를 길러내는 농장이 되었고, 정하완 셰프는 그 농장의 농부로서 살아갑니다. 단순히 언제가 제철인지, 제철의 채소에서는 어떤 맛이 나는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길러내는 채소가 얼마나 중요한지, 종자 보존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했습니다.
“유럽에서 요리하다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가장 놀랐던 건 채소의 맛이 다르다는 점이었어요. 분명 같은 이름을 가진 채소나 허브를 주문해서 같은 방식으로 요리를 해도 그 맛이 나지 않는 거예요. 이유는 하나에요. 그 재료가 가진 근본적인 맛을 내는데 집중하지 않고 그냥 비닐하우스에서 길러내기만 한, 모양만 같은 채소를 사용했기 때문이죠. 결국 본질은 사라지고 형체만 남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농장의 모든 채소는 노지에서 자랍니다. 햇빛을 충분히 받고, 겨울을 이겨낸 봄의 채소의 새순은 햇빛이 비쳐 보일 정도로 맑고 연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맛을 냅니다. 농부이자 셰프인 정하완 셰프가 그의 농장에서 레스토랑으로 가지고 온 4가지 제철 채소를 소개합니다.
원추리
집 뒤쪽의 비탈진 땅에 한가득 피어있는 원추리에서는 신선한 단맛이 납니다. “그게 진짜 봄 맛이지. 모든 채소가 궁한 초봄에 가장 먼저 올라오는 거거든 원추리라는게.” 농장의 농부이자 지킴이인 정하완 셰프의 부모님이 지나가시면서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원추리는 다른 봄채소들에 비해 뿌리가 깊습니다. 그래서 첫 새싹이 다른 어느 채소보다도 빠르게 나죠.원추리의 제철은 굉장히 짧습니다. 자랄 수록 독성도 강해지기 때문에 제철이 더더욱 짧은 편이죠. 정하완 셰프는 지금 나는 원추리 새순은 부드럽고 달콤하지만 5월을 지나 기온이 20도를 넘어가는 순간 지금의 신선한 단맛이 없어지기 때문에 제 맛을 즐기기 위해서는 서둘러 먹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기가스에서는 특유의 맛을 살리기 위해 센 불에 아주 빠르게 볶아내 여러가지 다른 재료들과 함께 그릇 위에 올립니다.
소렐
4월은 3월에 파종한 다양한 허브들을 수확할 수 있는 계절입니다. 와니농장 곳곳에서 허브가 자라나는 계절이기도 하죠. 그냥 빈 땅인가 싶은 모든 곳에서 허브가 자라나고 있습니다. 발을 디딜 때 마다 바닥을 살피며 허브가 있지는 않은지 조심해야 할 정도로요. 정하완 셰프는 “이거 한 번 먹어보세요”라며 수많은 채소들을 따서 건넸습니다. 노지에서 자란 민트, 오레가노, 타임, 로즈마리 등은 제가 알던 맛과 조금 달랐습니다. 제가 알던 것 보다 훨씬 강렬한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하지만 제 눈을 가장 반짝이게 한 것은 소렐입니다. 소렐은 시금치를 닮았는데, 맛은 완전히 다릅니다. 정하완 셰프는 땅에서 갓 딴 소렐 잎을 쥐어주며 말했습니다. “아주 강렬하면서도 신선하고, 그러면서도 부담스럽지는 않은 신맛이죠? 저는 이 신맛을 정말 좋아해요. 와인이랑도 잘 어울리는 신맛이거든요.”
기가스에서는 소금 대신 다양한 허브로 간을 맞추는데 이 신선한 산미는 음식에 적절한 리듬감을 줍니다. 이 신맛은 가을이 되면 점점 잦아들어서 단 시금치 같은 맛이 됩니다. 지금부터 가을까지 즐길 수 있는 채소지만, 신맛의 제철은 지금인 것이죠. 신맛의 제철을 맞은 소렐은 요거트와 사워크림을 넣은 후 얼리고, 곱게 갈아서 소스로 활용합니다.
봄마늘
봄마늘의 줄기에는 알싸함이 감돕니다. 마늘의 향이 나면서도 직접적인 매운 맛은 없기 때문에 음식과 잘 어우러지면서도 자신의 캐릭터를 잃지 않죠. "그 알싸한 맛에 집중한 소스를 만들고 싶어서 봄마늘, 부추, 양파, 쪽파 등을 섞어서 음식과 함께 내고 있어요."봄마늘은 그 자체로 제철 식재료이지만, 1년을 기다려서야 제철을 맞기도 합니다. 부추와 명이나물 등 봄마늘들은 곧 꽃대가 올라옵니다. 러시아와 유럽의 북부지방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식재료를 저장하는 것을 경험해온 정하완 셰프에게는 이 꽃대를 따서 소금이나 식초에 절이는 일이 기가스의 중요한 일과입니다. 그렇게 절여진 재료들은 1년을 돌아 이 계절에 다시 제철을 맞습니다.
뿌리채소
봄이 뿌리 채소의 제철이라니 조금 의아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기가스의 봄에는 뿌리채소가 제철입니다. “채소의 맛은 수분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그런데 잎 채소만 그런게 아니라 뿌리채소도 그렇거든요.” 잎 채소는 물을 주는 타이밍을 조절하며 물이 어느정도 빠졌을 때 수확을 하지만, 뿌리채소는 시간을 들여 수분을 빼는 작업을 거쳐야 최선의 맛이 납니다. 물이 빠진 비트에서는 흙의 향이 더욱 진하게 올라오고, 우엉은 갓 캐냈을 때와는 다른 맛을 보여줍니다.정하완 셰프는 광을 열어 바닥에 묻혀있는 장독을 보여주었습니다. “뿌리채소들은 수확한 후에 다 이곳에서 보관해요. 수분이 빠지고 나면 제가 힘을 많이 안들여도 될 정도로 맛있어져요” 땅에 묻혀 수분이 서서히 빠져서 셰프가 의도하는 바로 그 맛이 나는 순간, 이 뿌리채소들은 광에서 나와 햇빛을 보고, 주방으로 옮겨진 후 손님들 앞에 내어집니다. 수분을 땅속에서 말리지 않아도 좋은 맛은 여전히 낼 수 있지만, 더욱 많은 수고로움이 듭니다. 하지만 정하완 셰프는 그 수고로움을 자연에게 맡겨둡니다. “요리에서 재료가 자신의 캐릭터를 힘있게 끌어갈 수 있으려면 인간의 힘은 적게 들어갈 수록 좋으니까요.”
정하완 셰프의 농장에서 이야기를 들으며 깨달은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진짜 자연의 제철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도 훨씬 짧다는 것, 그리고 정하완 셰프는 기가스만의 계절을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 기가스의 음식은 ‘제철의 좋은 재료가 돋보일 수 있도록 가장 알맞는 조리법과 소스를 더한다’는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겨울에 수확한 재료라고 해도 기가스에서는 봄에야 제철을 맞고, 단 2주간만 수확할 수 있는 식재료를 6개월간 발효해야 사용할 수 있기도 합니다. 단순히 그 계절의 좋은 식재료를 내어놓는 것을 넘어서서 그 식재료가 가진 특징을 최대치로 끌어올려낸 그 순간이 새로운 의미의 제철이 아닐까요? 기가스의 봄에는 어떤 것들이 제철일지 궁금해하게 됩니다. 와니농장을 걸으며 맛보았던 허브들이 어떤 모습으로 그릇 위에 올라가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