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의 구불구불한 운하를 가로질러 인파의 홍수로 북새통을 이루는 리알토 다리의 번화가를 지나면 미로처럼 얽혀있는 좁은 길목에 서게 된다. 그 길을 따라 조금 걷다 보면 ‘바카리(bacari)라고 불리는 작은 선술집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옆 사람과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협소한 바 안에서 낮이건 밤이건 와인 한 잔과 치케티(cicchetti)라고 불리는 한 입 거리 스낵으로 요기를 하는 현지인들의 모습은 베네치아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치케티는 치케토(cicchetto)의 복수형으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식전 술 아페리티보와 곁들여 먹는 소량의 전채요리를 뜻한다. 스페인의 타파스나 핀초와 다르지 않다.
바카리에 들어서면 행복한 고민이 시작된다. 술과 함께 바에 진열되어 있는 수많은 종류의 치케티 중 먹고 싶은 것을 선택해야 하는데, 그 종류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미니 프로슈토 크루도 파니니, 바삭하게 튀긴 작은 오징어, 토마토소스에 푹 익힌 부드러운 미트볼, 프리타타, 속을 채워 구운 파프리카, 정어리 절임, 올리브 튀김, 각종 치즈와 살루미. 해산물의 도시 베네치아답게 싱싱한 해산물로 만든 치케티가 유독 다양하다.
집집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손님이 치케티를 선택하면 바텐더가 접시에 담아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내가 직접 직접 큐레이팅 한 애피타이저 샘플러인 셈이다. 점심이나 저녁 식사 전 스낵으로 즐기기에도 그만이고 모둠으로 푸짐하게 주문하여 한 끼 식사로 즐기기에도 손색없다.
편안하게 앉아서 술을 마시고 안주를 먹어야 하는 한국인들과는 달리 이탈리아인들은 서서 먹고 마시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다. 또 한 가지! 바텐더들이 주문을 받아 적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음식값의 계산은 암묵적인 상호 신뢰에 의해 이뤄진다. 베네치아에 가면 베네치아의 법을 따르도록.
맛 좋은 치케티를 먹으러 베네치아까지 갈 수 없다면? 종로구 소격동의 좁은 골목길 안쪽에 정통 베네치안 바카리를 묘하게 닮은 이탤리언 레스토랑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바로 2017 미쉐린 가이드 서울 빕 구르망 부문에 선정된 ‘이태리재’.
전통 한옥을 개조하여 만든 이곳은 그린색으로 포인트를 준 외관부터 입구에 들어서면 눈앞에 펼쳐지는 오픈 키친, 그리고 셰프와 마주하며 식사를 즐길 수 있는 바 석까지 여러모로 매력적인 공간이다. 한옥의 골조는 살리되 유러피안 빈티지 풍의 가구와 소품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이탈리아 현지의 분위기를 훌륭하게 재연해 냈다. 바석을 포함하여 25석 남짓 되는 아담한 공간을 총지휘하는 전일찬 셰프를 만나봤다.
이탤리언 요리 중에서도 베네치아 요리를 전문으로 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제가 베네치아와 그 지역 요리를 굉장히 좋아하기도 하고 베네치아의 치케티 문화에 매력을 느껴 서울에도 그 문화를 소개하고 싶었어요.
치케티가 무엇인지 간단하게 설명해주세요.
식사 대용으로 간단하게 때울 수 있는 요기거리에요. 혹은 술안주가 될 수도 있고요.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요리 중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중북부 쪽에서 즐겨 먹는 ‘폴렌타 알 네로 디 세피아(polenta al nero di seppia)’라는 요리가 있어요. 오랜 시간 저어가며 끓인 일종의 옥수숫가루 죽 폴렌타에 오징어 먹물로 만든 소스를 곁들인 음식이에요. 베네치아의 대표적인 솔푸드인데 화려하진 않지만 굉장히 매력적인 요리죠. 한국에서도 요샌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카르파초(carpaccio)’도 베네치아에서 탄생한 요리에요. 소고기, 송아지 고기, 사슴고기 등의 육류나 신선한 생선을 얇게 썰어 레몬, 올리브유, 소금, 후추 등으로 간을 한 음식이에요. 해산물이 풍부한 베네치아에서는 생선 카르파초를 즐겨 먹어요.
이탤리언 요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파스타를 떠올리는데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파스타 요리가 있나요?
비골리(bigoli)라는 파스타 면이 있어요. 전통적으로 메밀로 만들었으나 지금은 보통 통밀로 만들더라고요. 압출식으로 뽑아내는 면인데 부카티니처럼 두꺼운 편이에요. 이 면을 앤초비와 양파를 장시간 끓여 만든 소스와 버무린 게 베네치아의 전통 파스타 요리인 ‘비골리 인 살사(bigoli in salsa)’입니다.
이탤리언 요리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프렌치 요리처럼 섬세하지는 않지만 강렬한 매력이 있어요. 간이 좀 센 편이고 면, 쌀, 마늘, 고추 등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어요.
그라노, 몽고네와 부어크 팝업을 거쳐 이태리재를 오픈하기까지 셰프로서 이탤리언 요리를 계속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있나요?
20대 중반에 산티노 소르티노 셰프로부터 정통 이탤리언 요리를 전수받았어요. 그러다가 2012년에 추천을 받아 이탈리아로 넘어가서 현지 음식을 배우게 됐죠. 베로나 지방의 한 와이너리 안에 있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일을 했는데 그때가 저에게는 더없이 좋은 배움의 시기였어요. 서울에서도 이탤리언 셰프에게 요리를 배웠지만 한국에서 공부했던 이탤리언 요리와 현지 음식의 차이는 무엇일까 늘 궁금했었는데, 그 궁금증이 해소되면서 제 요리의 폭도 넓어졌고 이탤리언 요리를 더 좋아하게 됐어요. 요리를 계속해야겠다는 영감을 많이 받아왔죠.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가장 감명받았던 것은 무엇인가요?
책에서만 봤던 재료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만지고 요리에 쓸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았어요. 고기, 생선, 채소 등 한국에서나 이탈리아에서나 기본적으로 비슷한 재료들을 찾아볼 수 있죠. 그런데 생선의 예를 들자면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황새치가 이탈리아에서는 흔한 생선인 것처럼 신기한 재료도 많았어요. 이탈리아인들의 삶 안에 잠시나마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게 참 좋았어요.
치케티 전문점이지만 파스타와 육류 등 다양한 요리가 준비되어 있어요.
맞아요. 손님들께 베네치아 요리와 제 시그니처 요리를 둘 다 제공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적절히 섞어봤죠. 치케티의 경우 베네치아의 대표적인 것들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보시다시피 해산물 요리가 많아요. 봉골레 파스타, 성게 어란 파스타, 문어 라구 파스타 등 세 종류의 해산물 파스타가 있고, 치케티 역시 문어 샐러드, 광어 카르파초, 참치 카르파초, 홍합찜 등 해산물 요리가 더 많아요.
이태리재의 시그니처 메뉴는 무엇인가요?
성게 어란 파스타입니다. 3년 전 몽고네에 있었을 때 최고의 어란을 찾으러 전라도에 간 적이 있었어요. 그때 어란 명인인 최태근 선생님을 뵀었고 그분의 어란과 성게를 매칭 한 파스타를 최초로 시도해 봤었죠. 이태리재 초창기 때는 메뉴에 넣지 않았었는데, 손님들이 찾아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고정 메뉴가 되었죠.
묘한 공간이에요. 한국 같기도 하고 이탈리아 같기도 해요. 어떤 공간을 만들고 싶었나요?
처음부터 한옥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에요. 저에게는 집 자체보다는 집 앞 작은 골목길이 더 매력적이었어요. 베네치아에는 좁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이어져 있는데 골목골목 헤매다 보면 숨겨진 맛집들을 발견하곤 해요. 이 골목을 처음 발견했을 때 베네치아 생각이 났어요. 베네치아에 또 많은 게 목재 골조의 건물이에요. 그래서 외관과 골조는 한옥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고, 실내는 타일, 등, 그리고 리넨 등을 활용해서 유러피안 분위기를 살렸어요. 인테리어 디자인은 부어크 팝업 때 인연이 닿은 김채정 푸드 스타일리스트가 맡아줬어요. 오랜 시간에 걸쳐 의견을 교환했죠. 이 중에는 이탈리아에서 직접 가져온 의자도 있어요.
이태리재가 2017 미쉐린 가이드 서울의 빕 구르망 부문에 선정되었는데 그 후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손님들의 기대치가 높아졌어요. 좋은 현상이죠. 왜냐하면 저 또한 그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연초에는 베네치아에 다녀왔어요. 지역 음식으로부터 새로운 영감을 받고 싶었고, 어떻게 하면 제 경험을 이태리 재에 반영할 수 있을까도 많이 고민했어요. 지금보다 더 현지 분위기를 만들고 싶어요. 테라스도 활용하고, 치케티 메뉴도 더 추가하고 싶고요.
와인 리스트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요?
베네치아 지역의 와인이 주를 이루고 하우스 레드와 하우스 화이트 각각 한 종류씩 준비되어 있어요. 가격대 별로 와인 리스팅을 했는데 캐주얼 레스토랑이기 때문에 앞으로는 가성비 좋은 하우스 와인을 더 늘려갈 예정이에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바 의자를 없애고 손님들이 서서 먹고 마실 수 있는 진짜 베네치안 스타일의 치케티 바를 만들려고 해요. 치케티란 음식이 골라 먹는 재미가 있잖아요. 길가 테라스에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실 수 있는 재미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요. 고가의 와인보다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편안한 음식과 마실 수 있는 하우스 와인도 점점 더 늘려갈 계획입니다. 한국에 치케티 문화를 정착시키고 싶은 게 제 바람이에요.
발행일 2017.07.22